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기태(1969)/선수 경력 (문단 편집) ==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 ||<#182132> [[KBO 골든글러브|[[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height=40]]]] [br] [[틀:KBO 골든글러브/지명타자|'''{{{#b58a5d KBO 골든글러브}}} {{{#ffffff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1992~1994)}}}''']] || [[파일:SJDIekQ.jpg]] [[파일:ByUrXyr.jpg]] [[파일:/image/295/2010/01/06/%25BB%25E7%25C1%25F8_9.jpg]] 옆의 김기태보다 더 몸 좋은 분은 [[장훈(야구선수)|장훈]] 선생이며, [* 이 두 사람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인연이 있다. 장훈은 1970년대에 선수 생활을 했었고, 김기태는 2022시즌에 1군 타격코치로 일했었다.] 신인 시절인 1991년 훈련 당시의 모습이다. [[1991년]] 신생 팀 특별우선 지명을 받아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했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송유석]]은 해태가 김기태 대신 한양대 투수 출신의 [[오희주]]를 선택하여 김기태가 쌍방울 유니폼을 입게 된게 두 선수의 운명을 갈랐다고 술회했다. 김기태가 만약 해태에 입단했으면 붙박이 1루수 및 중심타자 [[김성한]]을 밀어내기 힘들었을 거라고 덧붙였다. 다만 결과론적으로 김성한이 1991년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이전만큼의 맹렬한 타격을 더이상 보이지 못했으며, 해태는 김성한 이후 [[장성호]]가 나오기 전까지 제대로 된 1루수가 없었기 때문에 김기태가 해태를 갔더라도 기회는 충분히 받았을 공산이 크다.] 쌍방울은 구단 차원에서 첫 시즌부터 투수에는 [[김원형]]과 [[조규제]], 타자에는 [[김기태(1969)|김기태]]를 구도로 팀의 간판을 만들어갔다. 그래서 김기태는 입단하자마자 팀의 4번타자라는 중책을 맡았으나, 5월까지 홈런 0에 타율도 2할 턱걸이라서 초창기 전주아재들이 김기태가 타석에 나오면 욕을 엄청나게 해댔다. 이 기간 본인도 마음고생이 굉장히 심했지만, 그래도 변함없이 믿고 계속 4번타자로 기용한 [[김인식]]감독 덕택에 5월부터 홈런을 쳐가면서 부진에서 탈출하였으며, 1991 시즌 타율 0.262에 27홈런을 때려내며 35개를 친 장종훈을 이어 홈런 2위를 기록하는 등 슈퍼루키의 등장을 알렸다. 그러나 신인왕은 하필 팀 동료였던 좌완투수 [[조규제]]가 엄청난 퍼포먼스를 기록하며 수상하는 바람에 받지 못했다. [* 조규제 역시 1년차 신인임에도 '''계투로 142이닝을 던지며''' 평균자책점 1.64에 27세이브로 구원왕을 차지했다.] 이후 김기태의 기량은 더욱 발전하여, 2년차인 1992년에 31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좌타 최다 홈런 기록을 갱신했으며, [* 이는 [[이승엽]]이 1997년 32개를 때려내며 경신했으며, 이후 1999년 '''54개''', 2003년 '''56개'''로 아예 차원이 다른 기록을 써내려가는 바람에 빛이 바랬다. 다만 99~03년은 KBO 역사에서 타고투저가 매우 심했던 기간인 것은 감안해야 한다.], 92~94년까지 3년 연속 지명타자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당시 스몰마켓이었던 쌍방울의 핵심 선수이자 타선의 해결사로 맹활약했다. 3년차인 1993년에는 타율 0.240에 고작 9개의 홈런을 치며 겉보기에는 민망한 성적을 냈지만 1993년이 KBO 역사상 최악의 투고타저 시즌이라 전체적으로 타자들의 성적이 곤두박질 쳤다는 걸 감안해야 하며, 실제로는 0.380의 높은 출루율과 wRC+가 135.1을 기록하는 등 나쁜 성적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당시 관점으로 보면 골글 수상은 좀 무리였음에도, 그해 타격왕과 홈런/타점왕을 차지한 양준혁, 김성래가 둘 다 1루수 후보로 가버리는 바람에 김기태가 그대로 지명타자 부문을 지켰다. 이듬해인 1994년에는 각성하여 25개의 [[홈런]]을 때려내 KBO 최초의 좌타 홈런왕을 차지했으며, 심지어 당시 '''방위병 신분이라 원정경기에 제약을 받아 당시 126경기체제였던 리그에서 18경기를 결장한 108경기만 뛰고도'''홈런왕을 따냈다. 95년과 96년에는 여전히 투고타저의 여파로 인해 홈런은 12개에 그쳤으나, 좋은 선구안을 바탕으로 한 1할에 근접한 타출갭과 5할에 달하는 장타율로 여전히 리그 최고의 1루수였다. 김기태의 최전성기는 1997년으로, KBO 역사에 남을 시즌을 만들어냈다. 0.344의 타율로 타격왕을 차지했으며[* [[KBO 리그|한국프로야구]] 역사상 홈런왕과 타격왕을 모두 수상해 본 선수는 김기태를 제외하면 [[이만수]]와 [[이대호]], [[김태균]], [[최형우]] 뿐이다. 즉, 이만수 이후로 홈런왕과 타격왕을 둘 다 수상해본 첫 사례다.], 26개의 홈런을 때려내고 .344/.461/.636 라는 엄청난 슬래시라인을 기록하며 OPS 1.096에 '''wRC+가 무려 202.6'''이었다. 이는 2023년 기준 단일시즌 wRC+ 역대 9위에 해당하는 대기록이며, 이 시즌 이승엽과 이종범, 박재홍의 홈런왕 경쟁으로 김기태는 주목도가 덜했으나 세이버로 봤을 때 97년 최고의 타자는 김기태였다. 게다가 이 시기의 쌍방울은 과거 김기태와 아이들 시절이 아니라 모기업의 대대적인 투자로 수준급의 투타를 구축한 팀이라서 당시 [[박경완]]과 [[심성보]], [[조원우(야구)|조원우]]가 같은 팀 동료로 있던 1997 시즌 [[쌍방울 레이더스]]의 타선은 상당한 무게감을 자랑했으며, 그 중심에는 김기태가 있었다. 핵타선 그 자체였던 삼성 다음으로 팀 타율 및 출루율, 장타율, ops가 전체 2위로, 우승팀 해태보다 우위였다. 다만 그건 번트를 자주 시도한 당시 [[김성근]]감독의 성향도 있을거고[* 번트를 하면 진루타인 내야땅볼과 결과는 같지만 타율이 보존된다. 당시 쌍방울은 시즌 해태보다 번트성공이 61개 높았다. 즉 아무리 지표가 높아도 내야땅볼이나 깊은 플라이와 결과는 같으므로 쌍방울의 저 지표는 해태와 비교했을때 허수가 많다. 홈런수가 해태(133)가 쌍방울(110) 한참 많은 것도 그렇고.] 득점만 3위. 도루수가 해태 148, 쌍방울 81로 당시 쌍방울감독 김성근은 도루를 자주 시도하지 않았고, 이게 득점 저하로 이어졌던 것.[* 쌍방울에 발 빠른 선수가 없는건 아니었고 1998~1999년에는 쌍방울 팀 도루가 늘어났기 때문에 그냥 이 기간동안만 도루를 적게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쌍방울에서 김기태를 제외하면 엄청나게 강력한 타자는 없었던 관계로 타 구단 감독이 '''"쌍방울은 김기태만 조심하면 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항상 집중 견제의 대상이었는데, 15시즌동안 사사구 '''975개'''를 얻어낸 것도 이를 증명하는 대목이다. 무려 '''한 시즌당 평균 65개'''다! 그것도 삼성으로 트레이드 된 이후에는 굳이 집중 견제를 할 필요가 없어져 저기서 멈췄지 쌍방울 시절에는 시즌 100사사구를 무려 3번이나 기록했을 정도이다. 쌍방울이 해체되지 않고 은퇴할 때까지 뛰었으면 통산 1000개는 가볍게 넘었을 것이다. 1996~1998년까지[* 1998년에는 삼성으로 팔려가기 전까지 주장직을 수행하였다.] [[김성근]] 감독 아래에서 쌍방울의 주장을 맡으며 뛰어난 리더십을 보였다. 오죽하면 당시 [[김성근]] 감독이 "구단이 아무리 어려워도 김기태만은 절대 팔지 말아달라", "김기태는 미래의 감독감"이라 했을까.[* 그리고 2015 시즌 당시 [[김성근|감독]]과 [[김기태(1969)|미래의 감독감]]은 각각 [[한화 이글스]]와 [[KIA 타이거즈]]의 감독으로서 만나게 되었다.] 훗날 [[2002년 한국시리즈]]가 끝난 후 김성근 감독의 회갑연 주최를 주도한 두 제자가 바로 김기태와 [[이연수]][*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외야수로 선수 생활을 했고, 쌍방울에서 선수단 매니저로 일하다가 [[김성근]] 감독의 요청으로 1999년에 잠시 선수로 복귀한 바 있다. 현재는 [[성균관대학교]] 야구부 감독이다.]였으니 쌍방울 시절의 인연이 보통 인연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2001 이후의 행보를 보면 [[홍현우]]보다는 조금 낫지만 그 역시 [[먹튀]]의 모습을 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